Guideposts    2018 / 09

                         

Cover Story


우리 시대 ‘선한 사마리아인’





내 부모, 내 자녀를 잃어버린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도 많고 가난으로 헤어진 가족도 많다. 열 가정 중 한 가정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들의 아픔을 체휼하며 이산가족 찾기에 발벗고 나선 경찰관이 있다. 지금까지 5600여 명의 헤어진 가족을 찾아 준 그는 월드레코드아카데미(WRA)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실종 가족을 찾은 사람으로 등재되어 있다. 백석대학교 경찰학부 이건수 교수가 바로 그다.
누군가는 그에게서 ‘눈물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 때문에 울고 가족을 찾은 기쁨 때문에 운다고 해서 한 말이다.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도 목자 없는 양 같은 우리를 보고 아파서 우셨다. 선한 목자는 ‘긍휼함’이 특별한 사람이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려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이 겪고 있을 고통과 아픔을 깊이 공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긍휼의 마음이 그가 망가져도 좋고 경찰복을 벗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실종 가족을 찾아 전국을 뛰어다니게 한 원동력이다. 그에게 이 일은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요, 주님이 부르신 사명의 길이다.


Q. 상고 출신으로서 특이하게 경찰이 되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가요?


전남 바닷가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서 친척 집에서 생활하다가 중학생 때부터 자취를 했죠. 당시 반찬은 간장이 전부였어요. 간장에 밥 비벼 먹으며 겨우 끼니를 때웠죠. 학교 도시락은 밥만 싸서 갔어요. 반찬은 친구들이 싸 온 것을 나눠 먹었죠.
그렇게 어렵게 살다 보니 막연하게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변에 똑똑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도 많았고요. 인권 변호사나 경찰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부산상고 졸업 후 법대에 진학했어요. 친구들은 대개 은행에 취직을 했죠. 평일에는 공부하고, 토요일이나 방학이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사장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영장이 나왔는데, 군대에 가면 매일 밥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찌나 반갑던지…. 당시는 워낙 못 먹고 다녀서 늘 하늘이 노랗게 보였는데 전 원래 하늘이 노란색인 줄 알았어요.
대학 졸업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어요. 하지만 고생스럽긴 마찬가지여서 한강 변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았어요. 한강 벤치에 누워 밤하늘에 뜬 달과 별을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그동안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건만 이 한 몸 누일 단칸방조차 없다니요. 하나님 너무하세요.’
삶이 너무 팍팍하니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어요. 명절에 집에 가서 어머니 손을 잡아 보면 손톱은 빠져 있고 마디마디가 어찌나 거친지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당시 어머니는 미역공장에서 미역을 손으로 찢어서 다듬는 일을 했는데 작업량에 따라 임금이 달라지니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거든요.
경찰청에 들어가 한창 바쁘게 일할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늦둥이에 막내아들인 저에게 유난히 헌신적인 어머니께 제대로 해드린 게 없어요. 지금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먹먹해져요.





--- 이후 내용은 2018년 09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