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동안, 공연 마지막 날이 성큼 다가왔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팀에 끼여서 적당히 지내 왔지만 공연 피날레로 장식할 성극의 성공 여부는 연출자인 나에게 달려 있었다. 겨우 열흘 남짓 연습해 온 것이니만큼 내용 전달에도 자신이 없었고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해 낼지도 자못 미심쩍었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었다. 기도와 노래, 율동이 이어졌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연극 순서를 기다리며 내 앞에 앉아 있는 20세 안팎의 젊은 아가씨들을 연민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고국에서 와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격해했다. 우리 팀의 작은 몸짓에서 표정 하나하나까지, 그들은 어떤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그 맑은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고향의 냄새를 눈으로 맡겠다는 듯이.
사이판에 어둠이 내리고, 공연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나는 문득 그들의 얼굴에서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을 보았다. 한창 젊음을 만끽하며 인생을 배울 나이에 이국만리 태평양의 섬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평온해 보였고 사랑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일까?
나 역시 이들과 환경이나 시기는 달랐지만 영화계에 들어서기 전, 부친이 물려주신 나염공장과 목장을 운영하며 내 삶의 확실한 터전을 찾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좌절도 했고 방황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내게 씁쓸한 사회의 단면들, 그리고 삶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을 뿐이다.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도 이런 갈등이나 좌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나는 똑같은 인생의 여정을 밟고 있는 친구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물밀듯이 내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동안 연극을 무대에 올릴 차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그들과 나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지금껏 고생하고 방황했던 것은 오로지 내 자신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였다. 가치 있는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뒤에는 자기만족과 탐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자족할 줄 알고, 개인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고국의 누군가를 위해 그들은 고통과 싸우며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을 향한 나의 연민은 존경심으로 바뀌어 갔다.
마침내 연극이 시작되었고, 그들의 환호와 탄성 속에서 공연은 막을 내렸다. 부랴부랴 준비해 온 연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은 정말 진지했고 만족스러워했다.
“정말 좋았어요, 다음 해에 또 오실 거죠?”
“저희들을 위해서 이토록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서 인사말이 들려왔다. 그중 유독 눈이 크고 앳돼 보이는 소녀 한 명이 내게 다가와서는 무언가를 건네주며 수줍은 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실은요, 아버지께 선물하려고 사 둔 것인데요. 이곳까지 오신 데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거예요.”
나는 빨간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싼 그 선물을 받아 들고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의미로 악수를 청했다.
“고마워요….”
그녀의 손은 거칠고 딱딱했다. 사랑과 헌신, 인내의 아름다운 삶이 거기 새겨져 있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이사야 65:17-18).
나도 모르게 언젠가 보아 두었던 성경 말씀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예기치 않던 깨달음과 감동이 가슴을 가득 메웠고 기쁨과 감사가 흘러나왔다.
이튿날, 우리 팀은 그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플랫폼에 들어섰다. 그때 어제 저녁 유독 눈이 크고 앳돼 보이던 그 소녀의 얼굴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줄곧 사이판의 여성 근로자들과 그 소녀를 떠올렸다. 나는 영화보다 가치 있고 감동적인 현실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나는 내 앞길에 무슨 일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 얼마나 많은 좌절과 갈등, 시행착오를 겪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사이판의 그 소녀가 수줍게 건네준 선물을 영화로 복제해 내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은 가이드포스트 1990년 4월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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